"그는 나를 이발관 의자에 묶어놓고 물고문 했다"
이효연 2019-05-16 오전 08: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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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8월 27일. 집을 나서던 한 청년에게 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힌 남자들이 에워쌌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는 동대문 경찰서에서 나왔소. 같이 가야겠습니다.”

넉달 전 교내에 시험지 유출사건이 있었다. 그는 경찰이 참고인 진술을 받으려고 왔나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는 세 명의 경찰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차는 동대문 로타리를 지나 한참을 더 달렸다.

차가 도착한 곳은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한 부대였다. 후에 알았다. 그들은 경찰이 아니라 보안사(현 기무사) 수사관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불법구금된 채 온갖 고문을 받아야 했다. 평범한 고려대 의대생이던 윤정헌씨는 어느새 간첩으로 둔갑해 있었다.

바로 ‘재일동포 유학생 윤정헌 간첩조작 사건’이다.

보안사 수사관에 의해 연행된 그 날부터 구속영장이 발부된 1984년 10월 8일까지 꼬박 43일. 보안사 장지동 수사분실에서는 재일동포 유학생을 간첩으로 만들기 위한 고문이 자행됐다.


그의 말이다.

연행되자 “간첩 자백하라”

“처음 연행되어서 갔는데 철문을 지나고 얼마 가자 건물이 있었습니다. 건물은 3층짜리 건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하도 1~2층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 1층 어느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약 2시간 정도 그냥 앉혀놓았습니다.

연행 후 계속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때도 손으로 뺨이나 머리를 많이 맞았습니다.

연행된 지 약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북한에 다녀오지 않았냐’ ‘공작원이 누구냐’고 물어보며 구타는 물론이고, 물고문을 했습니다.

고모씨 등 3~4명의 수사관들이 달려들어 나를 이발소 의자 같은 곳에 앉혀 팔과 다리를 의자에 묶고는 얼굴에 수건을 덮은 뒤 물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바닥이 아래로 꺼져 내려갔습니다.

의자가 바닥 아래로 내려갈 때는 컴컴했고, 1층 정도 깊이의 지하로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바닥에는 물소리가 났는데 물이 고여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의자에 묶인 채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을 견딜 수 없어 간첩죄를 거짓으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9년 11월6일, ‘10·26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수사본부장 전두환


그는 그렇게 간첩이 됐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그에게 “검사도 우리와 같은 수사관이고, 반공주의자이니까 너의 말을 안 믿는다”고 했다.

이어 “검찰 조사 때 진술을 번복하면 다시 고문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역시나 그랬다. 검사는 그에게 “다 증거가 있으니까 법정에서 부인하면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검사 이름은 최연희. 후에 여기자 성희롱 사건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한나라당의 최연희 의원이었다.

최 검사의 항소이유서를 잠깐 살펴보자. “피고인은 검찰 수사단계에서 수사검사로부터 대 진술시마다

사경에서의 진술 중 진실이 아닌 부분이 있으면 솔직하게 밝히고, 불리한 부분은 진술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으며, 20여 일간 수회에 걸쳐 조사하였고, 당 검사실에서 변호인과 부의 입회하에 검찰에서의 진술내용의 임의성과 정확성을 확인까지 하고도, 법정에서는 공소사실을 극구 부인하는 전례의 악랄한 간첩들 수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윤정헌은 보안사 수사관, 공안 검사가 만들어놓은 간첩 시나리오에 따라 기소됐다.

법정에서 이 모든 진술이 고문에 의한 거짓 진술이라고 밝혔지만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고 최종 확정됐다.

그에게 적용된 법률은 (구)반공법 제6조 탈출·잠입, (구)국가보안법 제2조(군사목적수행) 및 형법 제98조(간첩), 국가보안법 제3조1항 제2호(목적수행 간첩), 국가보안법 제6조2항(특수잠입·탈출), 국가보안법 제7조1항(찬양고무) 등 6개 항목이었다.

그는 대법원의 최종확정판결이 내려진 1985년 11월 이후 3년을 복역한 후 가석방됐다.

아무도 그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쥔 이후 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소리소문 없이 보안사로 끌려가고, 고문을 받다 숨지고, 간첩이 됐다.

1980년대는 유신정권만큼 엄혹한 시대였다.

윤정헌씨 같은 평범한 사람도 정권의 간첩만들기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보안사가 만들어낸 그의 시나리오는 이랬다.

<피고인 윤정헌은 1973년 4월 일본 교토대학 농학부에 입학한 후 재일조선유학생동맹과 조선문화연구회가 주최하는 학습회 모임에서 북한의 우월성에 관한 사상교육을 받고, 당시 유학동 간부였던 변모의 소개를 받아 1977년 4월까지 10차례에 걸쳐 주체사상 등에 관한 교양을 받았고, 1980년 고려대 의예과 2년에 편입학한 후 여름~겨울방학을 이용해 수차례 도일(일본으로 건너감)하여 변모로부터 사상교양과 지령을 받아, 서울 마포구 성산대교 검문서 경계상황, 서울시 교통상황, 계엄하 중앙청 건물의 경비상태, 서울시 안내도 등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해 보고하는 등 간첩활동을 하고, 대학 동기들을 포섭할 목적으로 반국가단체와 구성원인 김일성의 활동을 동조 및 찬양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했다.>


재일동포 간첩사건 구속 당시 경향신문에 보도된 내용. 맨 위 남성이 윤정헌씨다.


당시 31살이었던 젊은 청년은 27년이 지난 2011년 11월 재심을 거쳐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58세. 환갑을 눈 앞에 두고서야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러나 사법기관 어디에서도 사과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2012년 당시 자신을 고문했던 수사관 고모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죄명은 모해위증죄였다. 국가에 의한 범죄는 공소시효가 사라져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는 많다.

하지만 법은 ‘법적 안정성’이라는 명분 아래 여전히 공소시효를 두고 있고, 수사관 고씨는 고문으로 인한 피소가 아닌, 재심재판 과정에서의 위증으로 피소됐다.

윤씨는 1984년 당시 보안사 수사관으로 근무하며 자신을 고문한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윤씨의 재심재판 증인으로 참석해 “가혹행위를 하거나 허위자백을 강요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는 1972년부터 보안사에서 근무하며 1995년 퇴직할 때까지 군사법경찰관으로 근무했다.

2018년 1월 22일은 고씨의 위증죄 첫 재판이 열리는 날이다.

검찰은 윤씨가 고소한 지 6년이 되도록 아무 이유없이 묵혀뒀다.

재판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검찰은 얼마나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며 공소유지를 할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둬야 할 것이 있다. 윤씨를 고문한 자들, 수사하고 기소한 자들, 그에게 실형을 선고한 자들 중 누구도 그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32&aid=000284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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